http://www.hbrkorea.com/magazine/article/view/5_1/page/1/article_no/527
이번 HBR 6월 호 스포트라이트는 상당히 특별하다. 그 이유는 비즈니스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부딪히고 있는 거대담론에 해당하는 ‘기계로부터의 인간 소외’라는 전대미문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소외라고 하면 ‘왕따’처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번 HBR에서 논의하는 이슈는 조금 다르다. 바로 기계에 의한 소외다. 예를 들어 사람이 하던 주식매매를 이제는 컴퓨터 알고리즘이 대신하고, 기자 대신 로봇이 신문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무인자동차가 대중화된다면 택시기사도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인간 소외를 일으키는 정보기술,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 사물인터넷을 일컬어 2세대 기계라고 부른다.
2세대 기계와의 경쟁은 실업이나 저임금보다 심각한 직업의 소멸을 가져온다. 만약 인간이 생산과 직업에서 소외되면 이 역할을 하는 중산층은 경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결국 사회적 범죄율 증가로까지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이런 2세대 기술에 대한 이해와 소유의 차는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또 다른 동력이 될 것이다.
기계로부터의 소외는 인류 전체가 당면한 난공불락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현재 기계와의 경쟁에서 도태되는 인류를 위한 담론을 조심스레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이번 HBR 스포트라이트의 저자들이 인간 소외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하는 생산성 중심의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왜 이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는지 논의한다. 그리고 일과 기계와 공존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함께 논의하고자 한다.
[생산성 중심의 패러다임]
기업이란 일work과 사람을 연결하는 곳으로, 일할 사람들에게 해야 할 작업job을 나눠준다. 여기서 일을 얼마나 수행하는가가 바로 생산성이다. 생산성은 주류 경제학을 대표하는 지표로서 노동과 자본의 두 요소로 구성된 함수이다. 즉 노동과 자본을 늘리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자본을 투여해 노동력을 늘리는 방법이 생산성 증진을 위해 가장 쉽게 생각하는 방법이다. 이보다 좋은 방법은 바로 노동의 효율성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테일러리즘Taylorism에서는 노동생산성과 효율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다. 예를 들어 공장의 노동자들이 더욱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그들이 움직이는 동선과 시간을 연구해 불필요한 움직임을 없앴다.
일이라는 측면에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진행했다. 이른바 과업분석task analysis을 통해 일을 작은 단위로 나누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대표적인 방법이 분업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컨베이어벨트 주변에 둘러앉아 온종일 나사 하나만 돌려 끼우게 됐다. 아울러 사람들을 더욱 열심히 일하도록 북돋기 위한 동기화 방법도 연구했다. 이에 사내 급여 체계가 개발됐다. 나아가 급여를 단순히 높이는 것이 노동생산성 증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연구를 통해 내적동기를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복지책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것은 바로 기계였다. 흔히 산업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증기기관을 연상하지만 고대 이집트나 중국에서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계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2600년경 고대 중국에서 사용했던 주판(혹은 수판)은 정교한 계산 기계였다. 대나무를 상하로 구분해 위쪽은 알을 두 개, 아래쪽에는 알을 다섯 개 놓았다. 주판은 손이나 종이에 쓰는 것보다 복잡한 계산을 더욱 쉽게 할 수 있게 했고,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리했다. 이 주판이라는 기계 덕분에 상거래가 급격히 발달했고 대상인도 나타날 수 있었다.
주판처럼 증기기관도 노동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그래서 이를 산업 ‘혁명’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기계가 점차적으로 사람의 일자리를 대신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런 기계로 인한 노동력의 감소나 대체가 그리 심각한 이슈로 대두되지는 못하였다.
정보화기술(IT)은 산업혁명은 비할 수 없는 수준의 영향을 미쳤다. (물론, 컴퓨터 같은 IT 투자를 해도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장인 Solow 교수의 비판이 있었다. 경제학자인 브린욜프슨은 1993년 정보기술의 생산성 패러독스라는 저서를 통해 그는 IT기술의 도입은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문제는 1970년대를 넘으면서 가시화되는 생산성 향상과 일자리나 소득간의 이원화 이다.
과거의 기계는 사람들이 일을 잘 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동적인 도구였는데, 디지털기술,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 그리고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같은 2세대 기계는 생산성을 비약시켜내지만, 일자리나 소득은 여기에 늘지 않는 점을 브린욜프슨과 맥아피는 거대한 이원화(Great Decoupling)를 지적한다.
왜냐하면 2세대 기계는 수동적인 도구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산을 하는 능동적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기계 자체의 노동생산성이 인간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버를 멈추라’는 항의시위가 있었던 것이고, 핀텍(FinTech)의 열풍속에 인터넷 은행이 설립된다면, 매장의 은행원들은 사라져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13년까지 12년동안 영국에선 애플의 시리(Siri)같은 스마트폰 비서와 인터넷 가상 비서 서비스때문에 비서 일자리가 16만 3000개가 줄었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자본은 이제 무엇을 할까? 생산성이 노동과 자본의 함수이므로, 자본은 자연스럽게 로봇같은 2세대 기계를 투입하여 생산성을 높이려 할 것이다. 그래서 애플의 아이폰과 테슬라 자동차를 생산하는 중국의 폭스콘 공장에서는 수십 만 명의 사람이 하던 일을 로봇 1만대로 대치하겠다고 발표했다. 2세대 기계의 활용은 공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약사들이 하는 약을 선택을 해서, 제조하는 작업은 로봇이 실수없이 빠르게 잘 할 수 있다.
2세대 기술은 대부분의 중산층을 차지하는 지식기반 노동력을 대체해 나가게 된다. 근본적으로는 실업을 넘어 중산층의 직업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산층은 붕괴되고, 오직 빈부만 남는 극단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기계에 의한 직업의 소멸은 결과적으로 노동에서의 소외를 넘어, 직업사회에서 배제되면서 인간성(humanity) 위기를 야기시킬 것이고, 인류의 정신건강을 헤칠것이고, 범죄를 높일 것이라는 연쇄적인 예측을 할 수 있다.
[어떤 대안이 있는가?]
기계로 인한 소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노력들이 경주하고 있다. 물론 가장 소극적인 방법은 미래의 기계를 과거의 규제로 금지하는 것이다. 물론 현명한 대처가 될 수 없지만 이 부분이 우리나라의 주특기다.
이런 반-기계적 정책을 넘어서는 노력이 있다. 대표적인 노력은 반노동적인 로우로드(Low Road) 전략을 버리고, 친노동적 하이로드(High Road) 전략으로의 전환이다. 우리사회에서 흔히 보았듯이 로우로드 전략은 기업의 비용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해서 인원을 감축하고, 고용을 낮추고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해외로의 공장 이전도 이런 전략이다.
이와 달리 하이로드 전략은 1991년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위스콘신-매디슨대학 위스콘신 전략센터에서 제안한 ‘친노동적 경제전략 방식’이 기원이다. 이 제안은 주변 19개 제조업체가 참여하여 시행하였는데, 주체들이 고통분담을 하면서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기업의 생산성을 높인다. 이를 기반으로 다시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하이로드 전략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단기적인 처방이 될 수 밖에 없다. 생산주체들에게 고통을 분담하는 방식은 고도의 생산성을 만들어 내는 2세대 기계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생산성 중심의 경제성장 전략은 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계와의 경쟁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은 결국 양날의 검이 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노동이 입력이 되고, 생산성이 출력인 현재 패러다임에서 아무리 노동의 가치를 살린다고 해도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을 선호할 수 밖에 없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는가?
[패러다임의 혁신: 인간중심적 혁신]
이번 스포트라이트의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기계와 기술을 반대하고 싸우기 보다는 기계와의 공존과 협력을 꾀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기계를 반대한 쪽은 실패했다. 그렇지만 기계와의 공존을 위한 협력이 가능하다면 기계로부터의 인간소외라는 암울한 미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향해야 하는 바는 기계와의 상생에서 기계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계와 함께 공존하려면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방식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번 스포트라이트을 통해 HBR은 문제제기와 함께 대안의 틀을 제시하는 노력을 하였다. 브린욜프슨과 맥아피는 문제 제기를 하였고, 프릭(Frick)과 리브스, 젱, 밴야라( Reeves, Zeng, Venjara)는 인간과 기계의 공존을 위한 융합 연구를 제시했고, 마지막으로 Davenport는 제한되었지만 교육중심의 대안을 제시했다. 갈증이 나지만 적절한 방향성이다.
이들 네 편의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대안에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다. 전통적인 방식인 생산성 중심으로 노동을 바라보는 것이 양날의 검이었다면, 이제 생산성보다는 인간의 삶을 통해 노동과 생산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즉 생산성 중심을 넘어 인간과 삶, 일과 행복을 본질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인간중심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시각에서 기계와의 공존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일자리 창출과 교육의 솔류션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체화된 인지 패러다임]
기계로부터의 소외는 초학제적 융합이 아니면 불가능한 인류의 이슈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인문과 사회, 예술과 디자인, 기술과 응용을 포괄할 수 있는 논의의 틀이 필요하다.
인지과학은 그 탄생부터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고민하였고, 과학사 최초의 인문, 사회과학, 이공학의 융복합 컨퍼런스인 메이시 컨퍼런스를 기원으로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기계에 의한 인간소외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시작 모델을 제시 할 수 있다.
그런 시작모델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이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체화된 인지는 철학의 깊은 성찰과 사유에서 시작해서, 심리학과 인지과학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혁신적인 이론틀로 수용되고, 인공지능과 로봇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마케팅에서도 가장 핫한 이론중 하나다. 즉 폭넓은 분야에 걸쳐 인간이해를 다지는 최신 이론이면서도, 이미 기초와 응용의 여러분야에 영향을 펼치고 있다.
체화된 인지가 21세기 인문사회, 과학기술의 융합 패러다임으로서 수용되는 이유는 인간의 사고와 감정, 몸과 사회,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기반으로 기계와의 공존적 관계에서 인간의 고유한 특성(Uniquely Human)과 행복을 이해하기 수 있다.
초학제적 융합 연구는 기존 생산성중심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의 혁신을 통해 인간과 기술의 조화로운 공생을 탐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장기적으로는 교육을 혁신하고, 과학기술과 산업의 패러다임을 혁신해야 한다.
먼저 교육 측면에서는 저자들이 말하듯 우선은 단순하더라도 인간이 기계보다 잘하는 부분을 찾아 교육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답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는 않지만, 미래세대는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초중고의 교육을 바꾸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현재 학교에서는 지식과 스킬(skill) 중심으로 가르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분석되기 쉽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기에 용이하다. 즉 기계로 잘 대체될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 Davenport와 Kirby는 5가지 범주로 이 문제를 정리하였다. 우선 기계가 똑똑해지듯 인간이 더 스마트해지도록 인지(cognition)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한다. 두 번째는 기계가 가지고 있지 않은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 가드너의 복합지능이론에서 말하듯, 음악지능은 기계는 가지지 못했지만 인간이 잘하는 지능이다. 또 다른 방안은 기계와 함께 일을 하는 방식인데, 기계가 작업을 하는 과정을 모니터링하면서 기계의 판단결과들을 적절하게 수정하는 개입전략이다. 또 다른 방법은 인간이 전문성을 가지도록 성장하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는 이런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아직 기계가 어려운 부분은 지식과 정보에서 통찰을 해 내는 고도의 창의성, 사회성이나 돌봄같은 정서나 대인관계 역량이나,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조절하는 역량, 설득같은 프리젠테이션 역량 등도 기계가 대치하기 어려운 역량이라고 논의한다.
그러나 브릭욜프슨과 맥아피가 주장하듯 창의성 마져도 기계화되는 마당에, 인간에게 고유한 영원불멸의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지 기계와 인간간의 관계에서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대안도 사상누각일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기술적, 산업적 대안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현재로서는 체계적인 이론틀에서 Frick이나 Reeves, Zeng, Venjara 같은 인문사회과학중심의 과학기술 융합연구가 필요하다. 인간과 기계간의 옳바른 관계 설정을 위해 나를 이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 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연구를 기반으로 기계와 인간의 적절한 협력 모델을 창출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하기 보다는, 기계의 노동력과 인간의 노동력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십 여년전 박사논문의 주제이기도 한데, 인간이 하기 어려운 단순 반복은 기계가 하고, 데이타를 모아서 하는 고도의 추론이나 판단은 사람이 하는 집단지성 시스템을 개발하였는데, 그 것이 한 가지 예이다. 그리고 이를 사용하는 비지니스 프로세스와 비지니스 모델을 창출을 하는 것이다.
[결어…]
미국은 고작 200년 밖에 안되는 역사인데, 전 세계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산업을 끊임없이 선도하는가? 그 배경에는 탄탄한 인문사회적 역량이 시대의 문제를 끌어앉고 담론을 이끌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애플의 혁신이 어떤 공학기술때문이던가? 구글의 사업기획과 기업가정신이 공대에서 나온다고 보는가? 왜 CEO들이 인문사회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역량이 시대의 과학기술을 방향을 제시하고, 시대의 산업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번 스포트라이트는 인문사회과학의 기반없이 성장하려는 한국사회에 큰 시사점을 주리라 생각한다. 산업의 최종 수요자이며, 시작인 인간을 배제하는 생산성 중심의 과학기술과 산업 패러다임에서는 더 이상 미래를 담보하기 힘들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기술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경제 사회 활동 전반을 빠르게 변화시켜 왔으나, 결국 Great Decoupling에서 지적하듯 그 기술을 활용하는 인간 주체들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의 존재를 설정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아무 상관없이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실업과 경제상황은 시급하다. 그렇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이있는 것 처럼, 초학제 탐구과 시대의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이 바로 사회를 이끌고, 과학기술을 만들고, 신산업을 창조하여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나라의 사회과학은 미국인의 입맛에 맞는 미국의 사회과학 색인(SSCI) 저널에 영어로 논문내는 것을 가치있게 본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다행히도 기계로 부터의 인간소외는 범 인류의 이슈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회과학자들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소회해 본다.